스테판 에셀과 에드가 모랭은 전세계인에게 읽힐 목적으로 이 책을 쓴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 책의 모든 부분에서 저자들은 ‘우리 프랑스’를 위한 제언을 하고 있다. 저자들의 시야는 프랑스에 머물러 있으며 유럽연합에 대해서 말할 때조차도 거기에서 프랑스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말하기 위해 ‘유럽연합’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뿐이다.
팸플릿이라고 할 만큼 아주 얇은 책이니 굳이 본문 내용을 구체적으로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목차를 보는 것만으로도 이 책에서 다루는 내용을 충분히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책의 2부에서 저자들은 청소년, 윤리, 사회연대, 일자리, 경제, 소비, 불평등, 교육, 문화예술 등의 분야에서 정책 제언을 하고 있다.
이 책의 프랑스어 원제는 <희망의 길 Le chemin de l’espérance>이고 영어 번역서 제목은 <희망으로 가는 길 The Path to Hope>이다. 그에 비해 한글 번역서는 <지금 일어나 어디로 향할 것인가: 문제는 정책이다>라는 다소 긴 제목과 부제를 갖고 있다. 번역자나 편집자가 한글 번역서 제목에 부제까지 덧붙여 굳이 ‘정책’이라는 단어를 집어넣은 것은 이 책의 성격을 아주 잘 요약한 것이다.
이 책은 정책 제안서이다. 그것도 아주 짧은 분량에 아주 다양한 분야를 다루고 있는. 그러다보니 지금 프랑스가 겪는 문제가 무엇인지에 대해 친절하게 소개되어 있지 않다. 저자들은 주로 어느 문제적 분야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주장하는 데 많은 노력을 할애한다.
저자들의 정책 제언은 예컨대 박애센터 설립, ‘가까운 경찰서’ 부활, 초등교사 육성 전용 사범학교 부활, 식품 할인카드 제도 도입, 3대 상임위원회 설립 등 구체적이다. 그렇지만 그들의 제언은 역설적이게도 구체성이 결여되어 있다. 저자들의 해결책은 장밋빛 전망으로 가득차 있다. 자신들이 제안하는 정책만 도입하면 프랑스가 정말 멋지게 변화할 것 같다.
그러나 저자들이 주장하는 그런 정책이 왜 필요한지 숙고해보는 것은 차치하고라도(자괴감을 가질 필요는 없다. 한국 독자가 프랑스의 현실을 잘 모르는 것을 굳이 자신의 탓으로 돌릴 필요는 없으니깐), 그런 정책을 어떻게 도입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일말의 구체성도 제시하지 않는다. 아주 러프하게 말하자면 ‘좋은 게 좋은 거니까 도입하면 좋다.’라는 식이다. 뭐랄까. 대학 총학생회의 선거 정책집 같다.
정책 도입에서 ‘어떻게’는 무척 중요한 부분이다. ‘어떻게’가 없으면 정책은 공염불에 불과하다.
물론 이런 문제는 저자들의 생각이 짧아서가 아니다. 문제는 저자들이 생각하는 이 책의 기획 의도가 한국 독자들에게 잘 맞지 않는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이 책은 프랑스 독자들을 위해서 쓰였다. 그것도 오늘날 프랑스의 병폐에 대해서 관심이 있으되 포괄적인 대책을 생각해낼 수 없어서 안타까워하는 그런 부류의 프랑스인들을 위해서 쓰인 책이라고 볼 수 있다. 아주 짧은 분량 속에 아주 많은 정책들을 담아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그런 프랑스인들 말이다. 그런 프랑스인들이라면 이 책을 아주 쉽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굳이 한국 독자가 왜 이 책을 읽어야 하는지 의아해하며 반문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이 책이 한국 독자들에게 가지는 의미는 무엇일까? 한국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스테판 에셀과 에드가 모랭의 다양한 제언들을 대하면서 한국 사회에 적용할 만한 정책들에 대한 힌트나 아이디어를 얻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위에서도 지적했듯 매우 얇은 책이고 각 정책에 대한 자세한 설명들은 결여되어 있어서 그야말로 ‘힌트’ 정도만을 얻을 수 있을 따름이다.
그런 힌트를 얻기 위해서 읽어야 할 책이 반드시 이 책이어야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정책에 대한 개인적 관심 때문에 읽은 책인데, 한국내 스테판 에셀 열풍에 힘입어 번역한 책이라는 인상이 짙다.
예컨대 이 책에 가장 자주 나오는 단어는 ‘연대’이다. 한국 독자들은 이토록 고명한 저자들이 연대를 강조하니까 한국에서도 연대가 중요한 것일가 하고 궁금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프랑스는 프랑스고, 한국은 한국이다. 프랑스가 거쳐온 파란만장한 역사, 오늘날 프랑스가 처한 정치, 문화 현실을 생각할 때 저자들로서는 가장 강조할만 개념이기도 할 것이다. 근대 프랑스를 탄생시켰고 생각바른 사상가들이 늘 돌아가야 할 낙원처럼 생각하는 것이 프랑스혁명이고 보면, 프랑스혁명의 정신(자유, 평등, 박애)을 되찾기 위해서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이 무엇보다 연대라는 점은 반박의 여지가 없다. 생각해 보면 프랑스인들에게 ‘잃어버린 연대를 회복하자’고 주장하는 것은 한국 사람들에게 ‘잃어버린 정을 회복하자’는 말만큼이나 자연스럽고 보편타당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에서 잃어버린 정을 회복하자고 주장하면 고리타분하다는 소리나 들을 테지만.
번역 어투는 고색창연하고 다소 민망하다. 역자가 원문으로 삼은 프랑스어 원서를 구해볼 수가 없어서 영어 번역본을 구해 일부 살펴보았는데, 한글 번역본과는 내용과 구성이 조금 달랐다. 프랑스어 원서를 영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많은 편집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한국 번역본 12-13쪽에 길게 소개된 프랑스 국가(國歌, La Marseillaise)는 영어 번역본에는 나오지 않는다. 아무래도 영어 번역본의 경우 프랑스 국민을 상대로 쓰여진 책을 전세계인에게 읽히도록 만들기 위해 불가피한 편집이었던 것 같다. 이런 경우는 독자 입장에서 일정 부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한글 번역본에서 볼 수 있는 어색한 어떤 문장들은 역자가 프랑스어 원문에 충실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단어 선택이나 문장 구성 등에서 번역의 묘미를 잘 살지리 못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실제로, 편집 없이 프랑스어 원문을 그대로 옮긴 것으로 보이는 영어 번역본을 조금 살펴보면 한글 번역에 다소 어색한 부분들이 눈에 띈다.
예컨대 14쪽 첫문단은 “이데올로기 행세를 하는 경제자유주의는 실패한 시스템임이 밝혀졌다.”는 다소 뜬금없는 문장으로 시작되는데, ‘경제자유주의’가 ‘이데올로기 행세’를 한다는 말이 어색하다. 영어 번역본에는 “Even as free-market capitalism claims to replace all other ideologies, it has shown itself to be a failed ideology.”라고 되어 있다. 풀어서 설명하자면 이 문장은, 자유시장 자본주의가 다른 모든 이데올로기를 대체하는 유일한 이데올로기라고 주장하는데, 그런 주장을 하는 그 순간조차 그것이 실패한 이데올로기라는 점을 드러냈다는 뜻이다. 이데올로기가 아닌데 이데올로기 ‘행세’를 했다는 뉘앙스는 전혀 아니다.
지금 우리는 왜 이 책을 읽어야 하는가?
빼앗긴 정치를 탈환하라, 정책에 대한 관심으로!
그동안 우리에게 ‘정책’이란 단어는 사어와도 같았다. 선거 팸플릿에 등장했다가 당파 싸움에 밀려 이내 사라졌다. 국민들은 정치인들이 공약으로 내세운 정책들이 잘 지켜지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루트나 감시할 수 있는 단체조차 없었다. 최근 프랑스의 대선 투표 결과는, 인물 위주의 선거 캠페인, 세대와 지역에 따라 대립각을 세울 수밖에 없는 우리의 정치 현실에 의미 있는 통찰을 제공한다. 대선 1차 투표율 80%. 극우에서 극좌에 이르는 4개 정당이 두 자릿수의 의미 있는 득표율 기록.
다시 말해 국민 지지가 특정 정당에 쏠리지 않고 여러 정당에 흩어져 표출된 것이다. 전문가들은 정당 간 차이가 분명한 정책에 유권자 뜻이 반영되면서 다당제가 활성화하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었기에 가능한 결과라고 평했다. 이러한 프랑스의 정치 현실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각각 구순을 넘긴 프랑스의 두 지성이자 오랜 동지인 스테판 에셀과 에드가 모랭은 한 나라의 정책은 구호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정치의 방향을 결정짓는 중요한 가이드라인임을 보여준다.
두 사람은 관료화와 자본에의 종속으로 삶에서 멀어진 정치 현실과 생산적 자본주의에 기생하는 금융자본이 지배한 현재 자본주의 시스템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사회 구석구석에 걸쳐 비인간적인 자본주의에 제동을 걸 수 있는 개혁의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책은 웰리빙(bien-vivre) 정책, 연대의 활성화, 청소년정책, 재도덕화, 직장과 일자리, 다중 경제개혁: 복수경제, 소비 정책, 불평등, 교육, 문화예술, 국가, 정책 개혁과 민주주의 활성화, 쇄신으로 나뉘어 구성되어 있다. 의사들의 윤리 강령 히포크라테스 선서처럼, 이 책은 우리가 정치에 대해 기대하는 것이 무엇인지 되돌아보고, 정치의 근본정신을 되새기게 해준다. 정치에 뜻을 둔 정치인과 현재의 정치 현실을 바꾸고 싶은 독자들이라면 꼭 읽어야 할 필독서다.
차 례
I세계화, 인류에게 일어난 최상이자 최악의 사건
프랑스, 유럽, 그리고 세계
II정치를 사랑하기 위한 13가지 제안
왜 개혁하고 혁신해야 하는가
웰리빙 정책
연대의 활성화
청소년정책
재再도덕화
직장과 일자리
다중 경제개혁: 복수경제
소비정책
불평등
교육
문화예술
국가
정치개혁과 민주주의 활성화
쇄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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